최근 여러 반도체 기업들은 초미세 회로 패턴 공정을 위한 극자외선 노광 장비 선점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는 짧은 파장의 빛을 이용하면 반도체 기판에 더욱 미세한 회로와 패턴을 그릴 수 있고 소자의 면적을 줄일 수 있어 고성능·저전력 반도체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가진 높은 희소성으로 인해, 차세대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 기술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UNIST(총장 이용훈) 화학과 권오훈 교수팀은 펨토초(femtosecond, 10-15초) 레이저를 활용해 반도체 소재인 흑린(black phosphorus)에 나노미터 수준의 정확도로 미세패턴을 형성하고, 다양한 형태의 나노 구조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전 과정을 투과 전자현미경을 통해 실·시공간에서 직접 관측함으로써 나노 패턴이 형성되는 물리학적 이유와 그 근간이 되는 빛–물질 간 강한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도 함께 제시했다.
연구팀은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515 nm 파장의 빛을 흑린 시료에 순간적으로 조사해 빛 파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너비와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간격을 가진 나노 리본 배열을 만들어냈다. 이는 극자외선 노광 장비로 표현할 수 있는 패턴의 최소 선폭에 달하는 해상도이다. 특히, 흑린 시료의 결정 구조에 구애받지 않고 쬐어주는 빛의 편광(polarization)에 따라 리본이 형성되는 방향을 바꾸거나 큐브, 링 등 다양한 형태의 나노 구조체를 자유자재로 제작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결정 방향을 가진 나노 구조체만을 만들 수 있는 합성 방법들과 차이가 있다.
현재 소자 미세 공정에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전자빔 리소그래피(electron-beam lithography)의 경우 높은 해상도와 정밀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공정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 또한 전자빔을 기판에 스캔하는 과정에서 해상도와 정보처리량이 반비례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반해 연구팀의 광시야 포토리소그래피 기법은 사전 공정 과정이 필요하지 않고 해상도의 천 배에 달하는 영역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연구팀은 빛을 이용해 흑린에 미세 나노 패턴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빛의 변조 불안정(modulation instability)에 의한 ‘솔리톤(soliton)’형성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빛이 흑린과 같은 비선형 매질에서 교란 운동을 겪게 되면, 에너지 손실 없이 파형과 속도를 유지한 특이 파동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것이 솔리톤이다. 즉, 흑린이 조사된 레이저 빛과 상호작용을 통해 솔리톤을 생성했고, 부분적으로 에너지가 높아진 파동의 마루를 따라 인(phosphorus) 원자가 방출되면서 패턴이 만들어진 것이다.
제 1저자인 김예진 박사(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박사 후 연구원)는 “나노 구조를 제작하기 위해 기존 리소그래피 기술들은 탑다운 방식으로 이뤄져 왔고 화학 합성법들은 바텀업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며 “이번 연구는 빛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흑린의 특이 물성을 유도해 나노 패턴을 만들어 냈기에 탑다운과 바텁업 양방향으로 접근해 나노 구조를 만들어 낸 유일한 연구”라고 말했다.
권오훈 화학과 교수는 “투과 전자현미경을 활용해 광시야 포토리소그래피를 구현하고 패턴이 형성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측하면서 2차원 반도체 소재에 높은 해상도로 정확한 패턴을 동시 구현한 것은 처음이다”며 “빛-물질 간 비선형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광학 현상을 토대로 한 차세대 반도체 소자 제작 기술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한 연구”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의 이론 및 계산 분석은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박규환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됐고,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김관표 교수 연구팀도 참여했다. 연구 수행은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으며, 나노 화학 및 나노 소재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나노 레터스(Nano Letters)에 3월 6일(현지 시간) 자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