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덕분에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지난 2013년 UNIST 화학과에 자리를 잡은 독일인 토마스 슐츠(Thomas Schultz) 교수는 10년간 일한 모국의 좋은 직장(막스보른연구소)을 떠나 지구를 3분의 1바퀴나 돌아서 한국에 온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가 계속하고 싶었던 연구는 ‘상관회전정렬분광학(CRASY)’으 로 시료에 레이저를 두 번 쏘아 포함된 분자들의 구조와 질량을 동시에 구할 수 있는 신기술이다. 토마스 슐츠 교수와 동료들이 개발한 CRASY는 2011년 저명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구소 소장이 바뀌면서 신임 소장이 선호하는 연구주제로 바꿔야 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토마스 슐츠 교수는 그때의 기억을 잠시 회상하며 말했다. 독일 같은 과학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뜻밖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 젊은 과학자들은 살아남으려면 별수 없이 조직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 그는 하던 연구를 이어서 할 수 있는 독일의 대학들을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러던 중에 UNIST에서 교수를 초빙한다는 걸 알게 됐다. 다행히 UNIST는 그의 연구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유기화학에서 물리화학으로
사실 그는 역마살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대학을 5~6년 다녀야 하는 독일의 교육체계가 마음에 안 들어(학사학위 대신 석사학위를 받지만) 이웃나라 스위스의 취리히연방공대에 힘들게 들어가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요리에도 취미가 있었던 토마스 슐츠 교수는 원료들을 ‘요리해’ 새로운 분자를 창조하는 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는 합성한 분자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분광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갈수록 분광학이 재미있어져 결국은 전공을 물리화학으로 바꾸었다.
지난 1999년 학위를 받은 뒤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로 간 슐츠 교수는 분광학 연구를 이어갔고 2003년 모국으로 돌아와 베를린의 막스보른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CRASY라는 새로운 분광학 기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기존 방법들은 혼합물에 들어있는 분자들을 먼저 분리한 뒤 분석해야 합 니다. 반면 CRASY는 혼합물 상태 그대로 분자들을 분석할 수 있지요.”
이처럼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방법이고 이를 소개한 논문이 저명한 학술지에 실려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굳이 그렇게 복잡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냐?”는 식으로 반응하며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반면 그의 동료들은 “일단 새 연구소장이 선호하는 연구주제로 바꾸고 10년쯤 뒤, 자리가 잡히면 다시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UNIST가 아니었다면 그때 슐츠 교수는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부터, 끊임없는 도전으로
사실 슐츠 교수는 한국에 대해 잘 몰랐고 여행을 해본 적도 없다. 지난 2013년 UNIST에 부임할 때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달라 일상생활이 불편 할 수도 있다는 걸 이미 각오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빠르게 적응했다. 그럼에도 한국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바로 연구 때문이다.
“CRASY 장비는 매우 민감하기때문에 실험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세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 완전하게 자리를 잡는데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국의 장비 업체들은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작동이 안 되면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도 있어 슐츠 교수는 여러 차례 애를 먹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할 수 있는 것부터 실험을 재개했고 지난 2018년에는 CRASY 기술을 개선해 성능을 높인 결과를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화학을 혁신시키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어주길
최근 슐츠 교수는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사업에 ‘CRASY를 이용한 은하의 진화 과정 규명’이라는 연구를 제안해 선정되는 기쁨을 맛봤다. 우주의 성간공간에는 다양한 분자들이 존재하지만 그 정보를 담은 관측 스펙트럼의 20~30%만을 이해할 뿐이다. 성간공간에는 지구에서라면 너무 불안정해 존재하기 어려운 분자도 많을 것이다.
그는 CRASY가 미지의 성간공간 분자들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그 제안은 결국 사업에 채택되었다. 슐츠 교수의 실험실은 대학원생이 3명으로 적은 편이지만 이제 모든 준비가 갖춰졌기 때문에 좀 더 많은 학생들을 받을 여유가 생겼다. 그의 눈에 한국 학생들은 어떻게 비칠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독일 학생들은 학위를 받는 데에만 관심이 많고 연구는 열심히 하지 않지요. 반면 한국 학생들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크고 실험도 열심히 합니다. 대신 독일 학생들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반면, 한국 학생들은 지도교수가 지시해주기를 바라죠.”
그는 한국 학생들의 성실함과 독일 학생들의 독립성을 갖추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은 욕심이라며 웃는다.
“다른 길도 가보는 게 새 아이디어를 얻는 유일한 길”이라며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걸 적극 지지한다”고 덧붙여 말하는 토마스 슐츠 교수.
아직은 그가 개발한 CRASY의 잠재력이 널리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머지않아 과거 핵자기공명(NMR)이 그랬던 것처럼 이 기술이 화학을 혁신시키는데 중요한 도구가 되어주리라 믿어본다.